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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대 영화

법정 드라마 아닌, 아픈 사랑 이야기

칠드런 액트 글_이대현 영화평론가 칠드런 액트 글_이대현 영화평론가

이언 매큐언의 13번째 장편소설 <칠드런 액트>. 법과 종교 간 대립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최고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발휘한 작품이다. 제목 The Children Act는 1989년 제정된 영국의 유명한 ‘아동법’에서 따온 것으로, 법정이 미성년자(아동)와 관련한 사건을 판결할 때 최우선으로 ‘아동의 복지’를 고려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영화로 만들어진 이언 매큐언의 세 편의 장편소설 『속죄』(영화 제목: 어톤먼트), 『채실 비치에서』, 그리고 『칠드런 액트』는 해피엔딩이 아닌 어긋나거나, 깨져버리는 사랑의 이야기다.
그 비극 속에 비극을 더욱 비극적으로 몰아가는 전쟁이 있고, 재판이 있지만 소설이 붙잡고 싶은 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가슴 아픈 애잔한 남녀의 사랑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소설과 영화를 ‘전쟁’, ‘법정’ 드라마라고 말한다. 심지어 미국의 영화 웹사이트인 인디와이어는 꼭 봐야 하는 21세기 최고의 ‘전쟁영화 톱 25’에 놀랍게도 조 라이트 감독의 <어톤먼트>(2008년)를, 그것도 15위에 올려놓았다. 전장에서의 인간의 공포와 두려움, 참상을 깊고 섬세하게 드러내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덩케르크>로 더욱 유명해진 덩케르크 해안에서의 영국군 철수작전이 나오니까? 아니면 누명을 쓴 남자 주인공인 로비의 비극적 사랑과 삶을 전장이 삼켜버려서?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전쟁이 주인공들의 삶에 중요한 사건이고 무대임은 분명하다. 전장은 주인공들은 물론 주변 인물들까지 깊숙이 끌어들인다. 그것만으로도 분명 전쟁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소설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한 소녀(여자주인공의 여동생)의 오해와 질투에서 나온 거짓말로 무참히 부서지고 마는 남녀의 사랑이다. 단지 이언 매큐언이 그 사랑을 되돌릴 수 없는, 결국에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는 전장으로 끌고 들어갔을 뿐.

원작 대 영화 법정 드라마 아닌, 아픈 사랑 이야기-1

『칠드런 액트』도 그렇다. 소설 전체에 이어지는 것은 두 개의 ‘사랑’이다. 여자주인공인 쉰아홉 살의 가정법원판사인 피오나 메이와 남편인 잭, 피오나와 그녀가 담당한 재판의 주인공인 열일곱 살 소년인 애덤 헨리의 서로 다른 빛깔의 사랑. 제목이 말해주듯, 소설 첫 페이지에 적은 ‘아동의 양육과 관련한 사안을 판결할 때… 법정은 아동의 복지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영국 아동법 제1조 (a)항이 말해주듯 『칠드런 액트』는 판결과 재판에 얽힌,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가 『속죄』의 전장처럼 비극적 사랑의 무대가 되면서 한편으로 법과 도덕과 종교의 공방, 인간의 선택과 존재 가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깊이 성찰하게 한다.

이언 매큐언이 밝혔듯이 실존 인물인 알렌 워드 판사의 판결을 모아놓은 책을 바탕으로 한 판사 피오나의 간결하고 섬세하며 냉철한 판결문과 그녀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아름다운 선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뛰어난 지혜이고, 사회정의이고, 휴머니즘이며, 철학이고, 문학이다. 그녀는 ‘아내가 아이들에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실은 자신을 위한 것’이란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그냥 두면 심각한 기형인 한 아이가 6개월도 못 가서 죽고 그 아이가 비교적 건강한 다른 아이까지 죽게 만드는 샴쌍둥이 분리수술을 놓고 ‘광분한 언론’의 ‘세속적 실리주의로서 법률을 뒤로하고 쉬운 도덕적 방정식으로 무장한 논리’에 끌려들어가지 않는다.

워드 판사의 말대로 법정은 도덕이 아니라, 법을 다루는 장소이며 우리 앞에 놓인 유일무이한 상황에 맞는 적절한 법리를 찾는 것이 그녀의 과제이고,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그녀의 의무이다. 소설은 그녀의 서술을 통해 그 절박한 싸움에서 좋거나 덜 나쁜 결론은 오직 하나뿐이지만, 그렇다고 법이 허용하는 경로로 거기에 이르기가 쉽지는 않음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선택이 필요하며, 시간의 압박과 소란스런 세상이 기다리는 가운데 일주일도 채 안 돼 1만3천 단어로 이루어진 타당한 방안, 판결문을 완성한다. 차악의 선택이 비록 더 나은 선택이라도 여전히 불법임을 알지만 그녀에게 어떤 제한된 상황에서 더 큰 악을 막는 목적일 때는 형법의 위반이 허용된다는 ‘필요의 원칙’으로 논거를 만들어 준다.

판사 피오나의 판단과 선택, 그 과정에서의 고민과 결단, 그것을 담은 판결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진실하고 치열한 현실인 동시에 문학이다. 소설의 큰 줄기인 ‘여호와의 증인’을 믿어 수혈을 거부하는 백혈병 환자인 소년 애덤 헨리에 대한 판결의 과정도 같다. ‘피는 생명의 선물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이나 인간의 피를 섞는 것은 오염이자 타락’이라는 교리에 그녀는 인간의 생명과 건강회복이란 법을 내세웠다. 무엇이 아이에게 옳은 선택인지 고민하면서 판사로서는 전례가 드물게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소년을 만났고, 소년에게서 삶과 사랑에 대한 열정과 동시에 신앙에 대한 확고한 믿음도 확인했다. ‘수혈을 통한 치료’ 판결을 내리면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판결을 내리는 데 있어서 A(애덤 헨리)의 나이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신앙과, 치료를 거부할 권리에 내포된 개인의 존엄성에 응분의 비중을 두었습니다. 본 판결에서 A의 존엄성보다 소중한 것은 A의 생명입니다” 라고.

원작 대 영화 영화 법정 드라마 아닌, 아픈 사랑 이야기-2

이런 판사의 고민과 병실을 직접 찾아 애덤과 대화하고 애덤이 배운 지 4주밖에 안 된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는 일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그녀의 판결은 머리(지혜)만이 아닌 가슴(감동)도 있고, 그것이 뜻하지 않은 관계의 전개로 이어진다. 피오나에게는 지나간 하나의 사건이고 판결이 끝나면 모든 게 끝이지만, 애덤에게는 그렇지 않다. 피오나의 재판이 죽음 대신 앞으로 펼쳐질 모든 삶과 사랑의 제안이었고, 3초의 짧고 다정한 키스가 새로운 삶을 이끌어줄 ‘의미’가 됐고, ‘사랑’이 됐다. 재판과 달리 막상 자신의 감정과 선택에는 우유부단하고 두려워하는 피오나는 애덤에게 결국은 유다가 되고 만다. ‘그 여자 키스는 유다의 키스, 내 이름을 배반한 키스였으니, 제 손으로 내 십자가를 빠뜨리는 자는 죽임을 당할 지니’란 시를 보내고, 암이 재발했지만 이번에는 수혈거부로 ‘죽음’을 선택하는 애덤.

소설이 선택하는 비극적 사랑이 그렇듯, 이언 매큐언의 세 작품에서 사랑의 어긋남과 슬픈 결말도 ‘차이’에서 출발한다. 그 차이는 일차적으로는 사회적 신분과 계급, 빈부이다. 『속죄』에서 여자주인공 세실리아는 귀족이고 로비는 그 집 가정부의 아들이여, 『체실 비치에서』의 남녀 주인공인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도 비슷하다. 그리고 『칠드런 액트』에서 피오나와 소년에게는 거기에 ‘나이’라는 것이 더해졌다.

또 하나의 ‘차이’는 남녀 사이의 육체적 성관계이다. 이언 매큐언의 세 소설에서 사랑의 비극은 모두 섹스에 대한 태도와 반응의 엇갈림에서 시작된다. 『속죄』에서 비극은 열세 살의 여동생 브리오니가 언니와 로비가 몰래 섹스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시작되고, 『채실 비치에서』의 비극은 여주인공의 불감증에서 비롯됐다. 『칠드런 액트』에서 잭이 “죽기 전에 한 번은 대단하고 열정적인 연애를 하고 싶다”고 공식적으로 외도를 선언하고 집을 나간 것도 아내인 피오나의 섹스 무관심 때문이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들은 남녀의 사랑은 결코 정신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질 수도, 이어갈 수도 없다고 말한다. 『채실 비치에서』에서 플로렌스는 에드워드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어 결혼하지만 고통만 주는 섹스는 거부한다. “필요하다면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져도 좋아”라는 말에 남자는 모욕을 느끼고 떠난다. 먼 훗날 서로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만 깨진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다. 『칠드런 액트』에서 잭과 피오나 부부 역시 ‘섹스리스’ 때문에 위기를 맞는다. 애덤의 비극도 어쩌면 육체적 사랑이 두려워 삶의 모든 것에 정말로 목말라했던 한 소년을 외면한 피오나 때문인지 모른다.

영화 『칠드런 액트』

리처드 이어 감독의 영화 <칠드런 액트>는 소설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바이올린을 기타로 바꾼 것 정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나리오를 이언 매큐언이 직접 썼다. 과거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쓴 경험이 있는 데다 자신의 소설이니 작품의 색깔과 리듬, 분위기를 그대로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안다고 생각해 생략한 것들로 인해 영화가 불친절하다는 느낌, 이따금 껑충껑충 뛰어넘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노련하고 섬세한 감성과 심리 연기로 이야기와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피오나 역의 베테랑 배우 엠마 톰슨, 소박한 애덤의 바이올린 연주와 피오나의 노래이지만 귀로 듣는 예이츠의 시에 벤저민 브리튼이 곡을 붙인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는 소설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감동이다.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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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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