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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대 영화

덩케르크, 전장을 온전히 드러내다

원작 대 영화 - 덩케르크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원작 대 영화 - 덩케르크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역사는 전쟁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 아무리 현장을 누비며 기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편에 불과하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도 임진왜란의 수많은 전장 가운데 해전, 그것도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몇 줄, 몇 페이지로 전장에서 벌어진 수많은 일들을 기록하려는 욕심 자체가 무망한 일이다.

설령 수십 권에 달하는 방대한 서술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승패와 얄팍한 통계 몇 가지로 어찌 전쟁에 스며든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전쟁의 기록은 언제나 외눈박이일 수밖에 없다. 승자의 기록도 패자의 기록도 마찬가지다.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겪은 운명과 참상을 가장 엄격하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증언해 전쟁사의 고전으로 꼽히는 투키데스의 『펠로폰네스 전쟁사』부터가 그렇다.

그렇다면 문학과 영화는 ‘역사’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까. 이 역시 불가능하다. 아무리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고 해도, 상상력이나 허구를 가미하지 않았다고 해도 전장 속의 모든 인간들의 모습과 상황, 시간을 담지 않는 한 ‘역사’일 수 없다. 단지 전쟁을 이야기할 뿐이다. 말하는 사람의 시선과 선택과 감정에 따라 그 빛깔과 느낌이 다르다. 같은 역사라도 마치 사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그래서 역사의 기록, 특히 전쟁의 기록은 대체로 두 가지 중의 하나다. 지나치게 객관적인 통계와 상황의 나열로 전장 속의 인간들을 빠트리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감정적 흥분과 시각에 빠져 전쟁 그 자체를 과장 왜곡하거나 세계2차대전 초기 연합군의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담은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의 『덩케르크』도 그렇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개봉에 맞춰 국내에 ‘원작 아닌 원작’으로 출간된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서는 아니다. 채터턴 역시 역사적 사건을 다루기는 하지만 역사학자가 아니라 ‘작가’이다.

채터턴의 『덩케르크』는 2차세계대전사 최고봉이라 꼽히는 존 키건의 『2차세계대전사』에 비하면 방대하고 생생한 기록이다. 30만8천명의 연합군 대철수작전인 ‘다이나모작전’에 동원된 선박 하나하나의 행적을 추적했고,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 사료를 가지고 기술했다.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영국출신 ‘작가’로서 전쟁에 대한 시각과 감정, 해석도 숨기지 않았다. 때론 흥분한 문장으로 독일의 야만적 행위를 질타하고, 때론 감격적인 어투로 철수작전에 동참한 수많은 영국인들과 861척이란 정확한 수치로 제시한 온갖 배들에게 찬사를 늘어놓기도 한다. 그 때문에 기록으로서의 『덩케르크』의 가치가 훼손된 것은 아니다. ‘작가’로서 채터턴은 자신의 기록을 통해 2차세계대전사에서 ‘다이나모작전’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좀 더 크게 되새겨 보자는 것이었다.

이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덩케르크』는 작가 자신이 서술한대로 ‘철수과정에서 그 웅장한 장관은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감동적인 거대한 드라마’가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간단한 역사에 비해 엄청나게 상세하고 구체적인 ‘사실’의 기록과 그 사실에 대해 인간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은 평가에 있다.

그는 철수 작전의 모든 것은 전지편제의 기적에서 비롯되었다고 했고 군함에서 론 트롤선, 바지선, 소형 화물선, 석탄선에서 소형보트와 볼리(새우잡이 어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배들의 활약을 기억하는 대로 열거했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철수 작전의 영웅들과 그들의 희생적인 활약상과 진솔한 증언들도 빼놓지 않았다. 중간 중간 부상자를 태운 적십자가가 크게 그려진 병원선까지 무차별로 폭격해 침몰시키는 독일의 비인도적 행위에 작가 스스로 치를 떨기도 했다.

이런 충실과 친절, 감동과 분노의 반복이 오히려 독자들로 하여금 감정과 상상력을 무디게 하고 있다. 무수한 주인공들로 인해 주인공이 없는 이야기. 전장에서의 공포와 비장함, 허망한 죽음과 그것을 막으려고 자신의 목숨을 건 사람들의 고귀하고 감동적인 숨결을 독자들이 느낄 여유를 빼앗아 버렸다. 이 같은 느낌은 영화 <덩케르크>를 보고나면 더욱 커진다.

어차피 세상 어느 것도, 누구도 전쟁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이상, ‘사실’을 하나 더 이야기한다고 그것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전쟁을 다시 불러내 기억하고 느끼려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굳이 영웅일 필요도 없다. 한탄 병사에 불과하지만 그를 통해 전장에서의 인간의 가치이다. 피아를 떠나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무참히 짓밟히는 곳이 바로 전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선택은 놀랍다. 그의 <덩케르크>는 원작이 없다. 또한 역사적 사실이 원작이니 채터턴의 책이 원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영화는 그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흔히 전쟁영화에는 영웅이 등장한다. 아무리 유명한 전투나 전사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아닌 철수작전이라고 해도 정의와 전쟁의 비극성을 드러내기 위해 과장한다.

그러나 영화 <덩케르크>는 마치 새와 말과 물고기가 번갈아 관찰이라도 하듯 그날의 덩케르크를 무심히 담았다. 언제 독일군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아무런 방어시설조차 없는 해변에서 철수를 기다리며 줄을 서있는 수많은 병사들의 모습을 지상과 공중, 바다에서 때론 가까이서, 때론 멀찍이 떨어져서.

그는 흥분하지도, 채터턴처럼 감정의 언어들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날 덩케르크는 어떤 상황이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입체적 공간 이동의 반복을 통해 보여줄 뿐이었다. 육지로 나갈 수도, 하늘을 날아갈 수도, 배가 없어 바다로도 나아갈 수 없는 고립된 수십만 연합군 병사들에 대해 영화는 설명적이라기보다는 묘사적이다.

카메라가 처음으로 발견한 살아남기 위해 몇 번이나 배를 타려고 발버둥치는 영국군 어린 병사 토미(핀 하이트헤드)와 영국군으로 위장한 프랑스 병사 깁슨(아뉴린 바나드), 마치 카메라를 대신해 하늘을 나는 전투기 조종사 파리어(톰 하디), 바다에서의 현장을 대표한 작은 보트의 선장 도슨(마크 라이런스)에게도 마찬가지다. 육·해·공의 세주인공으로 선택한 이들 역시 가까이서, 그리고 번갈아 가면서 담을 뿐이다. 채터턴이 자신의 책에서 분노를 숨기지 않았던 독일의 폭격으로 병원선이 침몰하는 광경도 하늘 높이서 말없이 내려다본다.

과장이나 지나친 감정 대신 영화 <덩케르크>는 시계초침이 돌아가는 소리, 기차바퀴 소리를 연상시키는 음악으로 긴박감을 주고, 병사들의 아비규환과 죽음 직전의 아슬아슬한 구출, 도슨의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에 왜 아이들이 총알받이가 되어야 하지”란 짧은 한마디로 전장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상징화 한다.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스스로 먼저 흥분하지 않은 덤덤한 태도와 분위기의 연출이 관객들에게 긴장과 몰입을 준다. 실제 전장을 지켜보는 듯한 일체감을 가지게 한다. 이런 놀란 감독의 새로운 접근이야말로 <덩케르크>를 전쟁영화의 함정인 ‘미화’에서 빠져나오게 한다. 영웅을 내세우지 않고도 전장에서 누가 ‘영웅’인지,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관객들에게 일깨워 준다.

이 거대한 철수작전에서 영웅은 사력을 다해 살아서 영국으로 돌아간 수많은 병사들, 그들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배를 끌고 나간 사람들, 그 배를 지켜주려고 연료가 바닥이 나면서도 독일 전투기를 격추시키고는 포로가 된 조종사들 ‘모두’라고 놀란 감독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 역시 목숨을 지키고, 목숨을 지켜주는 일이라고.

그것은 마지막에 “살아 돌아온 것 뿐”이라며 부끄러워하는 병사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한 노인의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한마디로 충분하다. 영화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채터턴의 책도 한 장교의 증언으로 이를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9일간의 ‘다이나모작전’은 ‘승리’다. 영국 수상 처칠이 “철수는 승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철수 작전은 명백한 승리입니다”라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쟁 속의 인간의 존재가치를 역사의 기록을 넘어선 새로운 영화 언어로 보여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재능에 새삼 놀란다.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독특한 상상력과 시공간으로 인간의 가치를 탐험한 <인셉션>에 이어 두 번째다. 이런 그에게 ‘원작’이란 것이 필요나 할까.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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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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