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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불어넣는 기술자

호리구치 커피의 블렌딩 철학

제4화. 호리구치 커피의 블렌딩 철학 제4화. 호리구치 커피의 블렌딩 철학

일본 스페셜티 커피 업계의 선두주자인 호리구치 토히시데 박사는
오래전부터 “작든 크든 회사 혹은 카페가 만들어내야 할 블렌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뛰어난 품질의 커피는 그 개성적인 풍미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 마시는 것이 좋은 것도 있지만,
그럼에도 회사나 카페가 주체적으로 가져야 할 블렌드의 향미는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가 말하는 주체적인 블렌드의 향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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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호리구치 커피의 블렌딩 철학 제4화. 호리구치 커피의 블렌딩 철학

호리구치 커피가 오리지널 블렌딩에 강한 이유

내가 일본에 체류하던 1995년 무렵은 스페셜티 커피 시장이 열리기 전이었다. 요즘 같은 ‘좋은 콩’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블렌딩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커피 맛 역시 지금처럼 높은 레벨의 다양함도 없던 시절이었다. 스페셜티 커피가 대유행을 맞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 생산지의 기술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정제법의 생두가 유통되기 시작했고, 한국은 물론 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싱글 오리진이 ‘힙’하게 확산되었다.

일본 스페셜티 커피 업계의 선두주자인 호리구치 토히시데 박사가 이끄는 호리구치 커피는 120여 개 회사가 모여 공구 형태로 고품질의 싱글 오리진을 다수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좋은 원료를 확보하기 위한 그들만의 뛰어난 전략이며, 이를 통해 수십 년간 우수한 농원의 생두를 확보하여 오리지널 블렌딩을 만드는 데에 최적화된 환경을 구축했다.

  • 호리구치커피의 창업자, 호리구치 토시히데 박사
    호리구치커피의 창업자, 호리구치 토시히데 박사

좋은 싱글 오리진을 갖고 있다면, 사실 그것만 제공해도 될 것을 그들은 왜 블렌딩으로 판매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호리구치 박사는 “볶기만 하면 되는 커피을 팔려면, 내 이름을 걸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싱글 오리진을 전 세계에서 ‘나만’ 갖고 있다면 오리지널리티가 생기겠지만, 아쉽게도 시장은 그렇지 않다.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은 업체는 여러 회사에 판매를 하게 되고, 모두가 그 콩을 사면 차별화를 충분히 도모할 수 없게 된다. 애석하게도 최근의 한국 커피 시장은 너도 나도 동일한 싱글 오리진이 메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커피로는 차별화를 하지 못하고, 카페 안에 가구와 장비만 보이는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 호리구치커피가 제공하는 오리지널 블렌딩 차트
    호리구치커피가 제공하는 오리지널 블렌딩 차트

경험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스페셜티 커피 블렌딩

최근 호리구치 커피가 제공하는 블렌드는 총 9가지 정도로 차트화 되어 있는 것 같다. 9가지의 독창적인 블렌드를 만들려면 최소 50종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사에서는 100종류 이상의 싱글 오리진을 구비하여 블렌딩의 안정화를 위해 수시로 콩을 조정해 나간다. 하나의 블렌드에 배합되는 콩이 항상 정해진 생산지의 콩으로 만들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참으로 번거롭고 창의적인 생산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블렌딩에 사용할 커피 각각의 향미를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산지의 품종과 정제 방식에 따라서 향미가 더욱 다양해지기 때문에 스페셜티 커피의 블렌딩 작업은 경험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원료의 폭넓은 이해와 더불어 향미의 다양성을 증폭시키는 로스팅 기술력을 갖추어야 함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이러한 사실에 기반해 추론해 보건데, 호리구치 커피는 커핑 스킬과 로스팅 기술을 갖춘 마스터 블렌더 육성에 지난한 교육기간과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으리라.

  • 블렌딩된 원두
    블렌딩된 원두

오직 마스터만이 알고 있는 향미 유지의 비밀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면, 블렌드는 ‘향미의 이미지’ 즉 스타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산지나 농원이 달라져도 동일한 향미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로 항상 동일한 향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산지에 상관없이 이미지를 기준으로 블렌딩해야 한다. 농산물인 커피는 해마다 늘 동일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수시로 콩을 바꾸어 가면서 향미를 유지해야 한다. 생두의 성분은 보관조건 혹은 시간 경과에 따라서도 쉽게 변해버린다. 이 차이를 최소한으로 억제하며 만들어낼 수 있다면 정말 훌륭한 블렌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블렌딩이 단순히 정해진 배합으로 섞기만 하는 작업이었다면 이탈리아의 유명 커피기업인 ‘일리’나 ‘라바짜’ 같은 커피가 120년 동안이나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이탈리아의 커피 사랑은 아주 오래된 역사가 있고, 그 사랑은 기업들이 커피 생산지를 소유하여 원료에서부터 상품까지를 컨트롤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로 성장시켰다. 가업의 형태가 많은 이탈리아 기업답게 블렌드 원료와 배합, 로스팅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기업의 비밀로 하여 오직 ‘마스터’만이 관리할 수 있도록 한다고 알려져 있다. 오랜 시간 이어오고 있는 이러한 운영 방식은 그들이 표현하고 싶은 ‘향미의 스타일’을 유지함으로써 브랜드의 가치를 퇴색시키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됐다.

  • 로스팅 된 원두(좌), 생두(우)
    로스팅 된 원두(좌), 생두(우)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힘, 맛과 향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 있는데,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감염을 우려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코로나에 걸리면 후각과 미각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무척이나 공포스러웠다. 맛과 향을 느끼고 즐길 수 없는 세상이라니, 상상조차 하기 싫다. 미각과 후각은 우리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감각으로,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라는 박찬일 쉐프의 책 제목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맛과 향이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향에 스며든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향으로 기억되는 것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 이탈리아 바의 커피
    이탈리아 바의 커피

후각과 미각이 없다면, 맛과 향을 창조해 내는 마스터 블렌더의 이야기는 모두 허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맛과 향이 있는 삶에서 풍요로움을 느끼는 한, 상상을 뛰어 넘는 창의력을 가진 수많은 레미들(!) 덕분에 세상에 없는 맛과 향을 경험하며 영혼을 위로받기도 하는 것이다. 커피에는 마시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는 황홀한 매력의 향이 있기에, 음용의 역사 이래 단 한번도 우리 삶에서 사라져 본 적이 없는 특별한 음료이기에, 커피를 다루는 마스터들이 더욱 위대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커피 꽃은, 재스민, 오렌지 꽃 같은 향이 난다.
    커피 꽃은, 재스민, 오렌지 꽃 같은 향이 난다.
㈜후지로얄코리아 대표 : 윤선해

윤선해

㈜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커피교과서>, <커피집>, <커피과학>, <커피세계사>,
<스페셜티커피 테이스팅>, <향의 과학> 등 번역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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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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